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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을씨년스러운 크리스마스

아리스노바 2009. 12. 27. 13:14
이석원 <보통의 존재>


을씨년스러운 크리스마스였다.
아파트 20층에서 바라보기 무섭게.. 히뿌연 안개가 자욱하던날.
배가 고픔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들었다. 그리고 사고싶은 책이 생겨 알바가는 시간보다 한시간 일찍 일어났다. 다행이다. 두통은 없었다. 대신 진눈깨비가 크리스마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흐드러지게 내리고 있었다. 젠장.

두번째다. 책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이토록 갑작스레 끌린책은 이외수의 들개 이후 처음이다. 아니, 벽오금학도라고 해야할까.
그때도 그랬다. 밤 늦게 책만을 사기위해 수원역을 향했고, 진눈깨비는 아니였지만 가로등의 빛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비가 오던날. 군대가기 이틀 전이었다.

찾던 책은 서점 가판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요즘같이 죄다 양장본에 개지랄해 놓은 디자인의 책이 아니라서... 그냥 의자 3개가 그려져 있고 색상은 노란색. 생각했던 것 보다 진했고 두꺼우며 텍스쳐가 있는 커버.
책을 들며 웃었다.
노란색이 주는 의미와 잘못 스치면 베일 것 같이 잘 정돈되어 커팅된 종이. 사이에 들어간 트레이싱지. 만지면 부드럽고 두껍지 않은 종이에 무게까지. 딱 내취향이다. ;)

책을 읽으며 수원역 지하철로 가는데 살짝 두려웠다.
그때 '들개'를 사들고 막차를 타기위해 빠른 걸음을 걷다가 지하도에서 만난 아줌마를 또 만날까. 다시 만난다면 그때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을 물어보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고개행 1호선을 탈때까지 그런 아줌마는 보지 못했다.

준비해왔던 그의 노래로 주변 소리를 차단할 정도로 볼륨을 높이고 빠른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30페이지가 넘어갈때까지 별단 다르지 않는 에세이였다. 그의 상황. 생각들을 하나씩 알 수 있는....
문제는 이수역을 지나칠 때 즈음. 51페이지.

희망이 생기리라는 희망
소통이 가능하리라는 믿음
가족이라는 제도가 지속되리라는 기대...

읽는 순간 휴지에 흡수되는 물처럼 거부할 시간도 없이 흡수 됐다.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는데 눈물이 고였다. 지하철에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오랜만이다.

고개를 들어 눈물을 삼키자니 시선이 신경쓰이고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자니 눈물이 떨어질거 같았다.
어찌할바를 몰라 그냥 책을 덮었다.

나는 이런 희망, 믿음, 기대를 버린지 오래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꼭꼭 숨겨둔 항상 바라고 있는 걸 들킨거 같았다.



음반을 한창 모으던 시절 우연히 사게된 앨범이었지만 고등학교시절 씨디피의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했던 기억.
디카를 처음 내손에 쥐던날 전시회를 보고 집에가기 아쉬워 선유도로 목적지를 바꾸던 때 귓가에 들렸던 기억.
색다른 기억도 없는데 선유도만 가면 그때 빨갛던 하늘과 귀에서 울렸던 노래가 생각난다. '태양없이'
그러다 동생이 친구에게 빌려주며 서서히 잊혀졌다. 군대에서 신보 소식을 듣고 mp3로만 들으며 아이팟에서 금새사라졌...

내가 처음 그의 음악을 들었을때가 4집이었다. 대중성에 포커스를 맞췄다던... 그렇다고 대중들이 쉽사리 듣기 거북한 멜로디. 가사. 목소리를 갖춘.
목소리야 듣다보니 중독 됐고 그 눅눅한 기타소리가 좋았다. 물속에서 듣는 것 같았던 느낌이. 그러며 자연스레 알게된 그의 글.

책을 읽다보니 알겠다. 왜 그런 이런 음악이. 노래가. 가사가 나왔는지
오랜만에 공감할 수 있는 책을 만났다.

내가 한 말. 행동. 항상 느끼는 원인 모를 결핍 때문에 분열될 때.
찾아와 붙잡아 줘서... 고마워요. 책 잘읽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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