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otless Mind

‘키치’란 말의 뜻은 뭔가요? 본문

DESIGN Factory/글/스크랩

‘키치’란 말의 뜻은 뭔가요?

아리스노바 2007. 3. 30. 16:20
라디오에서 영화소개 해주시는게 마음에 들어 어떤분인가 검색해보다 알게된 코너에 '키치'라는 난해한 단어를 깊게 잘 풀어주신 글이 있어 가져왔네요. 스크랩글을 보통 '담아보기'라는 카테고리에 비공개로 혼자 보곤하는데 디자인사 공부하다보면 나오는 단어라 혹시 궁금하신 분있을까 싶어 공개해요. 사전적인 의미와 부르주아의 생활을 떠올리며 읽으면 이해가 쉬울 것같네요. 영화 전문기자 답게 영화로 설명하는 부분도 재미있네요.

김세윤기자의 궁금증 클리닉 섹션중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저작권은 Flim 2.0에 있는 것같네요.
이외에 다른 영화관련 질문들도 재미있는게 많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들려보세요. 들려보기

[질문] 영화 잡지를 읽다 보면 ‘키치적 발상’ 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키치’란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봐도 그 말뜻이 잘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가르쳐 주세요. 블루팝콘 liberty-flight@hanmail.net
 
[답변] ‘훌륭한 예술 작품과는 반대로 하찮고, 천박하며, 조악한 미완성 예술품.’ 당신이 찾아본 ‘키치(kitch)’의 사전적 의미라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을 거다. 한마디로 유치 찬란 촌티 만발의 속칭 ‘쌈마이’ 문화가 바로 키치라 이건데 이를테면 어울리지 않게 갈비집 마당에서 ‘뺑이’ 치고 있는 물레방아와 비단 잉어, 졸부네 거실에 장식으로 꽂아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중세시대 성 모양을 어설프게 본떠 지은 웨딩홀 따위가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키치의 전형이라 하겠다. 어디 그뿐이랴. 툭하면 배다른 형제와 사랑에 빠지고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뻔할 뻔 자 TV 드라마도 키치요, 철 지난 검정 교복 입혀 놓고 ‘학원 액숀 로망’이라는 대문짝만한 카피를 박아 넣은 <말죽거리 잔혹사>의 포스터도 키치이며, ‘팔도 과부 항시 대기’ ’오빠 오늘 죽었어’ 따위의 민망 카피 아로새긴 채 자동차 와이퍼 사이에 제 몸을 밀어넣은 유흥 업소 명함도 키치인 게다. 이걸 어떤 사람들은 평균적인 사람들의 평균적인 감수성에 어필하는 대중문화라고 좋게 봐주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속물근성의 저속한 삽질이라며 눈뜨고 못 봐주겠다 한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은 건가.

키치라는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건 1860년쯤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싸게 하다, 싸게 만들다’는 뜻의 독일어 ‘kitschen’과 일종의 ‘덤핑 판매’를 일컫는 독일어 ‘verkitschen’이 ‘짬뽕’되어 유래했다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왜 하필 19세기 중반이냐는 점이다. “나야 모르지”하며 배시시 골 빈 웃음을 짓는 건 백광호나 하는 짓. 본 코너의 독자들이라면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떠올렸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일약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부르주아들에겐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집구석에 그럴듯한 그림이라도 한 점 걸어놓아야 ‘뽀다구’가 날 터인데, 예술을 감별할 안목이 있나 그 안에 숨은 메시지를 간파할 혜안이 있나. 그저 적은 돈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허영심을 충족시킬 궁리나 한 끝에 대량 생산 모조 예술품의 시대를 앞당기게 된 것이다. 이윽고 방망이 깎던 노인이나 독 짓는 늙은이마냥 불타는 예술혼에 제 인생을 올인하는 예술 장인들은 하나 둘 변방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키치’라 불리는 통속적 대중문화가 꿰차기 시작했다. 초창기만 해도 ‘키치’는 일종의 비아냥 섞인 용어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아방가르드가 최전방의 예술이라면 유에서 ‘짝퉁이에유’를 창조하는 키치는 최후방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팝 아트가 유행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창궐하면서 키치는 졸지에 기존 질서에 타협하지 않는 전투적 아방가르드로 칭송받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키치를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인지 예술을 키치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평론가들이 ‘키치적 발상’ 운운하는 영화는 대략 이런 것들이다. <지구를 지켜라!> <다찌마와 LEE> <품행제로>… 대부분 통속성과 현란한 기교를 앞세워 대중의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들이다. 이때 거론되는 키치적 발상이란 일전에 얘기한 ‘B급 감성’과 사돈의 팔촌쯤 되는 사이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단순히 미적 취향만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젊은 감독의 진취적 기상을 격려하는 수사일 때가 많다. '어떤 작품이 키치적인 소재, 키치적인 형식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방가르드 정신을 담고 있다면 아방가르드'라던 어느 학자의 말처럼 남다른 상상력을 패기 있게 밀어붙인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을 이야기할 때 평론가는 자주 '키치적 발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키치적 발상’ 대신 ‘키치적 감성’을 논할 때는 조금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한 미술평론가는 '노스탤지어, 센티멘털, 단란한 가정, 강요하는 슬픔, 지나친 장식' 등을 키치적 감성의 예로 적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누구 말마따나 예술적 깊이 대신 대중적 호응을 선택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도 키치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키치는 사전적으로 정의하기 힘든 가변적 키워드다. 보는 각도에 그 모양과 해석을 달리하는 오륙도적 성질을 지녔다. 따라서 단순히 키치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그 평가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따지긴 힘들다. ‘프랑스 사람에게는 키치가 발리섬 주민에게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아브라함 몰르의 통찰처럼 그때그때 문맥의 뉘앙스를 잘 살피는 건 독자들의 몫이다. 독자들의 몫이 또 있다. 진정한 ‘키치적 발상’이란 세상에 ‘나쁜 취향’은 없으며 오직 ‘다른 취향’만이 있을 뿐이라는 상생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다, 부디 편견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이 땅의 다양한 취향을 두루 용인해 주기를, 오늘도 와이퍼에 매달려 ‘섹쉬~하게’ 나부끼는 유치 찬란 과부촌의 키치적 명함은 말없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