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otless Mind
‘미의 역정’이 길을 안내해 줄거야 본문
To: 디자인의 바다로 떠나는 웅돈에게
네가 디자인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나를 만나러 왔던 것이 지난해 초여름이었지. 해가 바뀌고 겨울 같지도 않던 올겨울이 가고 이제 봄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첫 만남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이것저것을 어눌함 없이 곰살궂게 물어 오던 네가 눈에 선하구나.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될 것이다. 20세기 시각디자인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바우하우스 출신 디자이너 허버트 바이예는 좋은 디자이너는 ‘3H’를 조화롭게 갖춰야 한다고 했다. ‘Hand, Head, Heart’가 바로 그것이다. 손과 머리와 가슴. 이 얼마나 멋진 말이냐. 좋은 디자인이란 솜씨와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뜻이다. 디자인 공부를 하다 보면 흔히 솜씨와 감성에 치우치기 싶다. 물론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특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네게 솜씨와 감성을 받쳐 줄 디자이너로서의 지성을 튼실하게 쌓을 것을 부탁하면서 그 길잡이가 될 몇 권의 책을 소개할까 한다.
먼저 존 네이피어의 ‘손의 신비’를 권한다. 컴퓨터 때문에 그야말로 손을 쓸 일이 없어진 것이 요즘 디자인 작업이지만, 컴퓨터는 결코 손을 대신하지 못한다. 컴퓨터가 도구라면 손은 바로 상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은 제2의 뇌라고 한다. 특히 디자이너에게는 그렇다. 손은 모든 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다음은 스기우라 고헤이의 ‘형태의 탄생’을 추천한다. 훌륭한 도판이 자랑인 이 책은 한마디로 동양의 조형 사상론이다. 사상이라고 해서 움찔할 필요는 없다. 아시아 도상 연구의 최고봉인 스기우라의 글은 친절하고 쉽다. 디자인은 서양에서 만들었고 그것을 우리가 수입했다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책은 그런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택후의 ‘미의 역정’을 읽었으면 한다. 동양, 아니 중국의 미학사상을 고대부터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쓴 이 책을 읽는 데는 앞의 책들이 큰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책 역시 도판이 훌륭하다.
다음은 레너드 실레인의 ‘알파벳과 여신’이다. 이 책의 바탕은 낯설지 않은 신화들과 좌뇌 우뇌 이론이다.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 그리고 표음문자인 알파벳에 대한 이야기가 뼈대 있으면서도 쉽게 쓰여 있다. 몇 군데 언급된 한자에 대한 견해는 탁월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문화’도 의외로 유익하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저자가 말하는 공예라는 말 대신 네가 공부할 디자인이라는 말을 대입시켜 보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공예를 말하면서 논의한 저자의 여러 가지 논설은 오늘의 디자인을 다시 생각해 보는 데 큰 지침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먹고 시간을 들여 디자인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 바란다. 정시화의 ‘산업디자인 150년’과 필립 멕스의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두 권이면 충분하다. 앞의 책을 능가하는 책이 아직도 국내 저자의 저술로는 없다. 그리고 뒤의 책은 세상이 다 아는 명저다. 양이 만만치 않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서양문화사를 시각적으로 다시 본다는 태도로 접하는 것이 좋다. 이 책들을 읽고 나면 너 스스로 디자인에 대한 눈이 높아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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